[김진태 BAND] 임금과 군수, 청도역에서 만나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과 청도군수 최현달

 

청도역(淸道驛)은 경부선철도의 역으로 서울 기점 361.8㎞ 지점에 있는 청도군 청도읍 고수리에 있다. 지금의 역사(驛舍)는 1987년 12월 11일에 신축한 건물이지만, 이보다 앞서 1946년 11월 1일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74년에 신축된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불타기 전 처음의 역 청사는 1904년 1월 1일 준공하여 1905년 1월 1일 경부선 철도 개통과 더불어 보통 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경부선이 개통한 지 4년이 지난 1909년 1월 8일 순종(純宗) 임금은 통감부(統監部)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강요에 의해 경부선 열차를 타고 남순행(南巡行)을 하게 되었다. 서울을 출발한지 8시간 만에 대구역(大邱驛)에 내린 순종은 일본 제복을 입고 일본이 무너뜨린 읍성 자리에 만든 신작로를 따라 달성 토성까지 행차했다. 당시 대구 사람들은 평생 처음 대하는 왕이 그야말로 치욕스러운 고행의 길을 지나는 모습이 안타까워 모두 길가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다시 대구역을 출발한 열차가 청도역에 잠깐 머물렀을 때 청도역에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임금 손종(純宗)과 마지막 청도군수 최현달(崔鉉達)이 만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남아있다.

 

“召見淸道郡守崔鉉達 地方委員等二十三人 淸道驛少駐時陛見也”(청도군수 최현달崔鉉達과 지방 위원 등 23인을 소견召見하였다. 청도역淸道驛에 잠깐 머물렀을 때에 폐하陛下를 알현하였기 때문이다) -순종실록 2년 1월 8일 양력 2번째 기사(1909년 대한 융희(隆熙) 3년)

 

예정된 접견이었는지 아니면 임금이 청도역을 지나다 갑작스레 청도군수를 불렀는지 또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지방위원 20여 명이 동석한 자리라면 경술국치(庚戌國恥) 1년 전의 일이라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심중에 있는 깊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한 것 같다.

 

순종(1874~1926년)의 휘는 척(坧)이고 고종의 유일한 적자(嫡子)로 명성황후(明成皇后) 여흥민씨(驪興閔氏) 소생이다. 조선의 왕세자로 있을 때나 마지막 제27대 왕(1907~1910)으로 재위하는 동안에도 일본의 강압에 눌려 제대로 왕권을 행사하지 못한 비운의 임금이었다.

 

청도군수 최현달(崔鉉達, 1867~1942)은 조선 말기 문신이자 유학자다. 자는 성내(聖鼐)이고, 호는 일화(一和) 또는 만정(晩靜)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대구(大邱) 남산동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최석로(崔錫魯)와 모친 진주강씨(晉州姜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894년(고종 31) 주사가 된 후 경상남도시찰사가 되어 부조리한 관리를 탄핵하였다. 1905년(광무 9) 제실회계심사관(帝室會計審査官)을 지냈고, 칠곡군수(1905년~1907)로 재임 중에는 백성들을 진휼하고 선정을 베풀면서 세금을 적기에 납부하여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1907년(융희 1) 이후 대구 판관(判官)을 거쳐 1908년 8월 청도군수로 부임하여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벼슬을 그만둔 마지막 청도군수였다.

 

최현달이 청도역에서 순종을 만났을 때는 이미 국운(國運)이 다했음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즈음 그가 지은 시 ‘차가육헌판상운(次駕六軒板上韻)’이 ‘일화문집(一和文集)’에 남아있다.

 

次駕六軒板上韻 가육헌에서

太華山光檻外多 창밖을 내다보니 태화산 아름답다

紫溪流水縣前斜 자계의 흐르는 물 고을 앞을 돌아가네

却恨晩來吟望處 늦은 녘에 시 읊으며 바라보니

寒烟一萬二千家 가난한 일만 이천 호 가슴 아플레 -노산 이은상 역

 

여기서 가육헌(駕六軒)은 청도 동헌(東軒)의 당호(堂號)이고, 태화산(太華山)은 화악산(華岳山)을 자계(紫溪)는 청도천(淸道川)을 일컫는 것 같다. 저물어 가는 약소국 백성이자 가난했던 1만 2천 호 청도군민의 아픔을 달래는 지방관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시다.

 

일화 최현달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에 비분하여 매천 황현(梅泉 黃玹),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와 같은 길을 가겠다고 단식자결(斷食自決)을 시도하다가 노모(老母)의 만류로 마음을 고쳐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오직 노모를 받드는 일뿐이니 그 외의 일은 나에게 알리지 말라”하고 일절 문밖을 나서지 않고 은둔했다.

 

조국 해방을 3년 앞둔 1942년 그가 죽은 뒤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선생이 행장(行狀)을 후일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 선생이 묘비명(墓碑銘)을 지었다. 그리고 경북 칠곡군 동명면 학명리에는 군수최현달애민선정비(郡守崔鉉達愛民善政碑)가 서 있다.

 

해방 후 그의 아들 야청 최해청(也靑 崔海淸, 1905∼1977)은 1948년에 대구에 청구대학(靑丘大學)을 설립하여 ‘새 역사의 창조자’를 길러내는 교육자의 꿈을 펼치려 했으나 1968년 대구대학과 함께 지금의 영남대학교로 통합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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