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권 변호사. 사진 2008 월간경산사랑 

 

◆법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

 

김재권 변호사. 그의 고향은 경산 삼성산 자락이다. 원효,일연,설총 삼성현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으니 그 스스로 영광이요, 자부심이리라.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년시절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선생님’이 꿈이었던 그는 고 3 여름방학 동안 절에서 공부를 하고 온 친구로부터 ‘고시생’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그 이야기에 홀려 서점으로 달려가 고시잡지를 사보게 되었다. 아마 고등학교 때 고시잡지를 사 본 사람은 그 밖에 없을 것이다.

 

 

“잡지에 있는 글들은 온통 어려운 한자투성이였고, 합격기를 읽어봐도 겨우 반쯤 이해되는 정도였지만, 어렴풋하게나마 합격만 하면 대단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 느껴졌죠.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판사나 검사가 되면 어떤지에 대해 물어보니 다들 ‘잘은 모르지만 대단한 것’이라더군요. 그래서 무엇에 홀린 것처럼 진로를 결정해버렸습니다.

 

 ‘사회정의의 실현’ 같은 거창한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그저 남들이 대단한 것이라고 하는 말에 혹해 느닷없이 도전의식이 불타오른 것이죠. 그렇게 결심이 서자 지금까지 꿈꿔온 선생님이 하찮아 보이고, 정말 어려운 시험이라는 얘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 후 자만심으로 인한 방황과 질병 등으로 7전 8기의 험난한 과정을 거쳐 서른넷의 나이에 겨우 합격할 수 있었어요.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매어 못 쓴다’는 속담이 실감나더군요. 특별한 사명감이나 목표도 없이 섣불리 결정하고 행동한 결과, 지름길을 두고 멀리멀리 둘러온 거죠.”

 

 

◆내게 특별한 기억!

 

비록 먼 길을 둘러 왔지만, 그렇기에 법조인으로서 그의 책임감과 자부심은 남다르다. 최근에는 법조인의 위상이 많이 추락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법조인에 대한 사회의 기대와 믿음은 크다. 법조인으로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봉사를 할 수 있다고, 힘 없고 돈 없는 서민들의 편이 되어 줄 수 있다고 믿는 그는, 그 동안 (사)아파트생활문화연구소 집행위원장, 아파트사랑시민연대 공동대표로 각각 4~5년여 활동해오며 지역의 아파트 문화를 한 단계 성숙시켰다는 주위의 평가를 받고 있다.

 

2년 전부터 포털 사이트 다음 카페 ‘김재권 변호사의 부동산 법률상담실’을 운영하면서 천여 건의 무료법률 상담을 해오고 있다. 또 모교 후배들을 위해 고시공부를 하는 동아리를 만들어 12년째 지원해오고 있는데, 그동안 25명의 합격자가 배출되었고, 1기생인 최유신 변호사는 그와 지금 함께 일을 하고 있어 그에겐 남다른 보람이라고.

 

 

“소송과 관련해 특히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어요. 할머니 한 분이 평생의 한을 풀어달라고 찾아오셨는데, 사연인 즉, 남편이 6.25사변 때 치열했던 포항지구 전투 중, 민간인으로서 수류탄 등의 수거작업에 동원되었다가 폭사하는 바람에 20대 초에 과부가 되어 세 아이를 키우느라 온갖 고생을 다해 왔는데 국가에서는 아무런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군인이나 경찰관이 아닌 민간인 노무자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한 선례가 없었기 때문인지 보훈청에서도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죠. 할머니의 사정이 너무 딱해 무료로 변론을 하기로 했지만 승소를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1심판결을 앞 둔 어느 날, 할머니는 ‘꿈에 영감이 생생히 보였는데, 김재권 변호사가 꼭 한을 풀어 줄 것이다’고 했다며 도리어 격려를 해 주셨는데, 신기하게도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고, 마침내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판결을 받아내 할머니는 매달 상당액의 보상금을 타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8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보은을 하고 계세요. 판결이 나자, 지역 TV방송국기자에게 연락해 난생 처음 인터뷰를 하게 해 주시고,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홍보해 주십니다. 그리고 80이 넘으신 지금까지도 매년 한두 번씩 한해도 거르지 않고 참기름 두 병과 떡이 가득 든 보따리를 들고 찾아오십니다. 이제 그만 오셔도 된다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영감 보듯이 오는데….’라며 막무가내세요.”

 

 

◆전문성으로 독보적인 영역을 확보해야!

 

김재권 변호사는 국민들에게 질 높은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로스쿨 도입, 법조인들의 의식제고 등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화라고 강조했다. 법조인들이 자기만의 고유한 전문분야를 개척해야 한다는 말이다. 부동산 분야, 특히 건설, 재건축 관련된 소송의뢰인이 변호사를 찾아갔는데 실무를 전혀 몰라 답답했다는 하소연을 종종 듣게 된다며, 이런 것이 사법 불신의 원인이 된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과거 법조인이 소수였던 시절에는 각자의 몫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굳이 경쟁할 필요가 없었지만, 매년 1천명씩 뽑는 현실은 경쟁이 치열하므로, 자신의 전문영역을 확보하고 개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2000년부터 대구 최초로 8개 전문분야를 ONE-STOP SERVICE하는 법무법인을 시도했는데, 당시 부동산경매팀을 맡으면서 경매법정이란 곳을 처음으로 가보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까지 1천여 건의 입찰과 명도업무를 수행해 오고 있는 명실상부한 부동산전문변호사로 자리매김 했다. 대구대 대학원에서 부동산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경북대학교 대학원 건축공학과 박사과정 5학기에 재학 중(도시설계 전공)인 그는, 미국, 캐나다, 일본 등지로 부동산개발현장에 답사여행도 다녔고, 부동산강좌를 듣기 위해 서울을 몇 개월씩 오가기도 했다.

 

      

“10억 원의 펀드를 모아 부동산투자개발회사를 운영하던 중 주상복합아파트를 지었다가 투자금을 몽땅 날린 일도 있고, 자본금 150억 원의 부동산개발회사 실무 이사로 복합도시개발사업, 건설회사 M&A 등 굵직한 프로젝트에 참여해 보기도 했죠. 이런 과정을 거쳐 이제는 제법 남들이 부동산전문변호사로 대접해 주는데, 제 스스로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연구하고 경험해 볼수록 어렵고 두려워지는 것이 부동산분야입니다. 작년에 경매분야 연구의 결과물인 ‘경매법테크’란 책을 매일경제출판사에서 펴냈고, 올해는 ‘부동산개발’ 관련 책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사무실에 30평의 강의실을 마련해 4월부터는 고급경매강좌도 시작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부동산이지만 이번만은 확실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5년 전 20년 후 자산 100조원의 다국적 부동산투자회사를 꿈꾸며 시도했다가 비록 실패했지만,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와 경험을 축적해 다시 한 번 그 출발점에 서보고 싶습니다.”

 

 

◆고향은 혈연과 같은 것!

 

꿈을 향해 멈추지 않는 그는 ‘향수’란 노래를 유별나게 좋아한다고.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란 노랫말처럼 삼성산 자락 고향집에서 바라보던 들판의 풍경은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도 불쑥불쑥 떠올라 가슴 아린 향수를 자극하곤 한다. 고교시절 사정동으로 이사해 3년 가까이 남천 가에 살며 여름밤엔 남천에서 멱 감고, 성암산에 산책 갔던 기억들, 2년을 콩나물시루 같았던 1번 버스를 타고 1시간씩이나 통학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고.

 

고향의 쓰레기매립장반대운동과 소송 때는 데모로 구속된 분들의 변호를 맡아 풀려나게 할 수 있어서 기뻤고, 쓰레기매립장설치처분취소소송 1심과 고등법원에서 승소했지만 대법원에서 패소한 사건은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전체 시민들을 위해선 바람직한 사업이었지만 고향 주민들에게는 생존권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요즘 고향을 다녀올 때마다 나날이 바뀌어가는 경산시의 스카이라인을 보며, 경산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낍니다. 비록 고향을 떠나 살고 있지만, 한농연 경산시지부, (재)경북테크노파크의 법률고문을 맡고 있고, 고향은 혈연과 같은 것이어서 절대 버릴 수 없습니다. 내 꿈이 있다면 언젠가 여건이 된다면, 고향을 위해 뜻 깊은 사업을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출처] 2008 '월간 경산사랑'

이 기사는 2008년 월간경산사랑에 소개 된 내용입니다. 월간경산사랑은 웹플러스뉴스의 전신입니다. 인터넷 웹플러스뉴스는 [인물&이사람] 코너를 새롭게 운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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